서론: 현대 인물 예화
어떤 유명한 교수님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이론을 설명할 때 항상 같은 말을 붙였습니다. “이 이론은 여러분을 괴롭히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여러분을 돕고 준비시키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학생들은 종종 공부가 어렵고 부담되니까 “왜 이런 걸 배우냐”고 불평하기도 했지만, 그 교수님은 늘 말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을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길을 열기 위해 필요합니다.”
성경도 때때로 어렵고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권리, 희생, 섬김 같은 말씀은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왜 이런 내용을 담고 있느냐?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얽매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고 복 주시기 위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째, 바울의 사도적 권리: 그러나 복음을 위해 포기한 삶. 1절 2절입니다.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강해)
바울은 먼저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여기서 “자유인”이라는 말은 단순히 신분적 자유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사도가 아니냐”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세 가지 근거로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체험입니다.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사도는 반드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길 위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 자리에서 사도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두번째는, 바울의 사역의 열매입니다.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고린도 교회의 존재 자체가 바울의 사도됨을 증명했습니다. “너희가 믿음 안에 서 있는 것, 그게 바로 내가 사도라는 증거다” 하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교회가 바울의 사도 됨을 ‘인친 것’입니다.
2절에서 “인친 것”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도장을 찍어 확증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세워진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바울의 사역에 인을 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분명한 사도의 권리가 있음에도 바울은 왜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4절부터 6절입니다.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바울에게는 먹고 마실 권리, 가정을 꾸려 아내와 함께 사역할 권리,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있었습니다.
이건 당연한 권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이것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면 혹시라도 사람들이 “바울은 복음 전하면서 이득 보려고 한다” “교회 돈 때문에 사역한다” 이렇게 오해할까 봐, 복음이 걸림돌이 될까 봐 모든 권리를 내려놓았습니다.
(해설)
바울이 권리를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은 권리를 버려야만 했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내려놓았습니다. 권리는 하나님이 주신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권리보다 더 큰 가치가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람은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 흐르는 중요한 영적 원리입니다. 권리를 포기함으로 더 큰 하나님의 일을 이룬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적 예시)
아브라함이 조카 롯에게 먼저 땅을 선택하게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13장에서 아브라함은 집안의 어른이었고, 우선권은 아브라함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하며 권리를 내려놓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더 큰 땅과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바울도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버림으로 고린도 교회가 복음의 은혜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첫 번째 대지 결론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고, 누구보다 정당한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내려놓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복음이 조금도 가로막히지 않게 하려는 마음, 그리고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려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도 삶 속에서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들이 있지만, 때로는 주님을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내려놓아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그 내려놓음이 때로는 손해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 희생과 마음을 귀하게 보시고 반드시 갚으십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권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복음의 가치를 붙들었습니다.”
이 믿음의 선택이 있을 때, 그 가정과 교회와 삶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은혜가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안을 이 땅에서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둘째, 하나님 말씀의 원리: ‘일하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당연하다’. 9절입니다.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강해)
바울은 9절에서 신명기 25장 4절을 인용합니다.
“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 농경 문화에서 나온 실제 상황이었습니다. 추수한 곡식을 타작할 때, 소가 곡식을 밟으며 타작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일을 시키면서도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게 입에 망을 씌웠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정당하지 않다’, ‘수고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원리로 금지한 것입니다.
즉, 이 율법은 단순히 동물 보호가 아니라 “수고한 자에게 마땅한 대우를 하라”입니다. 이 원리를 세우기 위해 주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수고하고 땀 흘린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소를 염려하시느냐?”라고 물으며, 이 율법은 사람, 특히 하나님 일을 하는 사람, 수고하는 사람을 위해 주신 말씀이라고 해석합니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 흐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정당한 보상, 공의로운 대우, 수고의 열매를 중시하시는 분입니다.
(성경적 예시)
민수기 18장에서 하나님은 레위인에게 십일조를 배분하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너희는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이니, 이스라엘 백성의 십일조를 너희 몫으로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 일을 위해 땅을 분배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의 생활을 책임지신다는 원리가 이미 율법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한, “품꾼의 삯을 당일에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일한 사람에게 삯을 미루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유는 “그의 마음이 간절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일하는 자의 마음과 사정을 아시고, 그들의 억울함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누가복음 10:7)
예수님도 제자들을 전도자로 보내시며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역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 정당한 대우가 있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이어 오셨습니다.
야고보서의 책망 – 삯을 떼먹는 부자들을 향한 경고 (약 5:4)
야고보는 “품꾼들의 삯을 가로채는 것”을 엄하게 책망합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억울하게 당한 사람들의 울음을 절대로 묵과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성경 전체가 말합니다. “수고한 자에게는 마땅한 대우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공의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시는 분입니다.
(예화)
어느 마을에 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날은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날이었는데, 동네 젊은이가 하루 종일 그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햇볕은 뜨겁고, 허리는 아팠지만, 젊은이는 묵묵히 끝까지 일을 마쳤습니다.
일이 끝나자 농부가 품삯을 건네주는데, 약속한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이 주었습니다. 젊은이는 놀라서 말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많이 주셔도 괜찮으신가요?”
그러자 농부가 웃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하루 종일 수고한 만큼 정직하게 주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그 말을 들은 젊은이는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그 농부를 평생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인심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하는 자에게, 헌신하는 자에게,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자에게 정직하게 갚아주신다는 진리와 같습니다.
사람은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 하신 말씀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헌신과 수고를 기억하시고, 때가 되면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위해 헌신하십시오. 그 헌신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시고, 넘치도록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셋째, 복음을 위한 헌신: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사용하시고 채우신다. 11절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강해)
여기서 “신령한 것”은 복음입니다. 생명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바울의 수고를 말합니다. 반대로 “육적인 것”은 교회의 물질적인 도움을 뜻합니다.
즉,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했다면, 교회가 바울의 생활을 도와주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안에서 정해놓은 원리입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대가가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에게 교회는 마땅히 보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분명 “받을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서는 그 권리를 쓰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혹시라도 “바울이 복음을 돈벌이로 한다”는 오해가 생길까 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 장막을 만들며 생계를 해결했습니다. 복음에 조금도 흠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헌신입니다. “받을 수 있는 것”을 버린 헌신. “누릴 수 있는 것”을 내려놓은 헌신. 복음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권리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사랑입니다.
(성경 예)
성경에도 이런 하나님 방식의 보상이 계속 나타납니다.
구약에서 사르밧 과부를 보십시오. 엘리야가 과부에게 “먼저 나에게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말할 때,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말이 안 되고, 손해 같고, 위험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작은 헌신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하나님의 채우심이 임합니다.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아니하니라.”
즉, 하나님께 드린 헌신은 결코 비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습니다. 어린아이가 내민 오병이어. 너무 작은 것이라 아무 의미 없어 보였지만, 주님께 드려지니까 오천 명이 먹고 남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순간, 작은 헌신이 하나님의 손에서 큰 기적으로 변합니다.
(적용)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은 절대로 허공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시간을 드리고, 힘을 드리고, 재정을 드리고, 마음을 드리는 모든 헌신은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잊혀질 수 있어도 하나님께는 절대 잊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교회에서 봉사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걸 누가 알까?”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괜히 나만 힘든 것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사르밧 과부처럼, 오병이어처럼 하나님은 헌신을 결코 헛되게 두지 않습니다. 때로는 마음의 위로로, 때로는 필요한 환경의 변화로, 때로는 건강으로, 때로는 자녀의 은혜로 채우십니다.
우리는 보상을 바라보고 헌신하는 게 아니지만, 하나님은 헌신을 보시고 반드시 채우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 드린 마음은 절대 허투루 되지 않습니다.”
이 원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아주 단순합니다.
“하나님께 드린 헌신은 절대 헛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반드시 채우신다.”
이 진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신약에 한 명 더 있습니다. 바로 베드로입니다.
누가복음 5장을 보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허전하고, 배는 빈 채로 새벽을 맞은 겁니다.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베드로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자기 경험을 내려놓고, 자기 지식을 내려놓고, 그냥 주님 말씀에 헌신한 것입니다. 그 작은 순종 하나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베드로의 빈 배는 어느새 넘치도록 채워졌습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주님께 드리는 마음, 순종, 헌신은 결코 헛되지 않다는 것.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크고, 더 풍성한 채움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말합니다.
“우리가 신령한 것을 뿌렸으니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채우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수고를 아십니다. 교회에서 드린 작은 봉사부터, 이름 없이 드린 기도, 조용히 흘린 눈물까지 다 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반드시 채우십니다.
베드로의 빈 배를 채우신 것처럼, 사르밧 과부의 항아리를 채우신 것처럼, 여러분의 삶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이 은혜의 확신을 붙잡고, 흔들림 없이 헌신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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