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우리가 본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요즘 세상 사람들을 보면 누구를 닮고 싶어 하며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텔레비전이나 신문, 휴대전화 속 이야기를 보면 잘된 사람, 성공한 사람을 본받고 싶어 합니다. 돈을 많이 번 사람, 이름난 사람, 잘 나가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처럼 살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그런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을 따라 하고,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 잘되는 집을 본받아 흉내 내며 살아왔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보고 배우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성탄절 이브의 밤에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본받으며 살고 있는가?”
오늘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 말을 들으면 혹시 바울이 자신을 높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히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바울은 자신을 본받으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본받고 있는 예수님을 함께 바라보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 삶의 태도에서 자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성탄은 단지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몸으로 보여 주신 날입니다. 겸손하게 오신 예수님, 섬기기 위해 오신 예수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이분처럼 살아라”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날이 바로 성탄절입니다.
오늘 이 성탄의 밤에 우리가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자고 말입니다. 이 성탄이 예수님의 모습을 마음에 담고 그분의 길을 한 걸음 따라가는 복된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본론 1
첫째, 성탄은 하나님께서 먼저 본이 되어 오신 사건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탄은 단순히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이 아닙니다. 성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렇게 살아라” 하고 말씀만 하신 날이 아니라, “내가 먼저 이렇게 살아 보이겠다” 하시며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신 날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성탄의 핵심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말씀’은 곧 하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모습만 사람처럼 바뀌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앉아 “사랑하라, 겸손하라, 낮아지라” 이렇게 명령만 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직접 육신을 입고 오셔서 배고픔이 무엇인지 아셨고, 눈물이 무엇인지 아셨고, 아픔과 외로움이 무엇인지 몸으로 겪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말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은 왕궁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황금 침대도 없었고, 사람들의 환호도 없었습니다. 가장 초라해 보이는 자리,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왜 그렇게 오셨을까요? 하나님은 권력으로 사람을 변화시키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억지로 눌러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누가복음 2장을 보면 천사들이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들도 제사장이나 율법학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목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나라이고, 강한 사람에게 먼저 임하는 나라가 아니라 약한 사람에게 먼저 찾아오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겸손의 본, 낮아짐의 본, 섬김의 본을 하나님께서 먼저 보여 주신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그저 감동적인 옛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입니다.
“너희도 이렇게 살아보겠느냐?”
이제 이 말씀을 우리의 삶에 한 번 비추어 보겠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녀에게 말합니다.
“정직하게 살아라.”
그런데 아이는 날마다 부모가 작은 거짓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 아이의 마음에 무엇이 남겠습니까? 말이 남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이 남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말을 기억하는 존재가 아니라 본을 따라 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탄으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꾸짖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기 위함입니다. 명령이 아니라 본으로, 요구가 아니라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을 맞은 우리는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만 듣는 신앙이 아니라 주님을 닮아가는 신앙이 되게 하소서.”
③ 적용
성도 여러분, 성탄절은 단지 예수님의 생일을 축하하는 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삶으로 보여 주신 날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 나는 내 삶으로 예수님을 드러내고 있는가?
– 우리 가정과 교회 안에서 나는 어떤 본이 되고 있는가?
우리는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삶, 겸손과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가려는 마음, 그것이 성탄을 맞이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늘 이 성탄의 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발자취를 한 걸음이라도 따라가는 복된 성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2
둘째,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으로 성탄을 살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매우 담대한 말을 합니다.
“나를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자칫 잘못 들으면 교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즉시 그 기준을 분명히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바울의 초점은 언제나 자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정표로 살았습니다. 바울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왜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을 높이기보다 교회를 세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분쟁과 다툼이 많은 교회였습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하며 서로 갈라졌습니다.
그때 바울은 자신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그는 말합니다.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은 자신이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주인공은 언제나 하나님이셨고, 자신은 그분의 종에 불과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정신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의 권리를 앞세우기보다 약한 자를 배려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옳다”는 주장보다 “저 사람이 실족하지는 않을까”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늘의 모든 권리를 내려놓고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또한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 맞고, 옥에 갇히고, 배고프고 외로운 순간에도 그는 한 번도 “이쯤이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이는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바울이 살아낸 성탄의 삶입니다. 자기 유익을 내려놓고 타인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낮아지는 삶, 그 삶이 성탄을 살아내는 참된 모습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이 말씀은 단순한 인간관계의 기술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육신 신앙, 곧 성탄의 신앙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상대의 자리에 서서, 그 영혼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바울의 삶은 말보다 더 큰 설교였습니다. 성탄은 오늘도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나처럼 내려와 줄 수 있겠느냐?” “나처럼 포기할 수 있겠느냐?”
바울처럼, 예수님을 본받는 삶으로 성탄을 살아내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3
셋째, 성탄을 사는 성도는 세상 앞에 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탄의 빛은 결코 교회 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탄의 의미를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입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예수님은 “너희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행실을 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세상 속에서 설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보여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탄은 단지 예배당 안의 절기가 아니라 세상 속으로 나아가는 파송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빛으로 오셨듯이, 성탄을 사는 성도는 그 빛을 반사하는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빛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빛은 어둠을 밀어내고 다른 것을 보이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도의 삶도 “나를 보라”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보게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의 삶이 자신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은 말로 가르치기 전에 자신의 삶으로 먼저 그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을 사는 성도는 세상을 정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밝히는 사람입니다. 어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둠 속에 작은 등불 하나 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집 안이나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일터에서, 가정에서, 그리고 이웃 가운데서 드러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 시간에만 보이는 신앙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너는 왜 그렇게 착해?”
그 아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가 교회 다니거든.”
부모가 아이에게 신앙 이야기를 많이 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특별한 설교를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이는 이미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보다 삶을, 가르침보다 태도를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이들은 부모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따라 자라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삶의 모습을 보며 자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말로 전해지기 전에 먼저 삶으로 보여야 할 신앙입니다.
이것이 성탄을 사는 성도의 책임입니다. 우리는 완벽해서 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모습으로, 회개하고 다시 사랑하는 모습으로 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탄의 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곧 내가 세상에 남겨둔 성탄의 흔적이다.”
가정에서, 이웃에서,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으로 성탄을 살아내는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은 동방박사들의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줍니다. 마태복음 2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이 짧은 한 구절 속에는 성탄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결론이 담겨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자기들이 계획한 길을 따라 살았습니다.
별을 따라 움직였고, 왕궁을 먼저 찾았고, 세상의 상식과 계산대로 판단하며 걸어왔습니다. 그러나 말구유 앞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난 그 순간, 그들의 인생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길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조용히 말합니다.
“그들은 다른 길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탄은 단순히 마음이 잠시 따뜻해지는 사건이 아닙니다. 눈물이 나는 감동적인 이야기로 끝나는 날도 아닙니다. 성탄은 삶의 방향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났다면 생각의 방향이 달라지고, 선택의 기준이 달라지며, 삶이 걸어가는 길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눈 말씀을 돌아보면, 하나님은 먼저 본이 되어 이 땅에 오셨고, 바울은 그 예수님을 본받는 삶으로 성탄을 살았으며, 이제 그 믿음의 바통이 오늘 우리에게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백은 명령이 아닙니다. 억지로 따르라는 말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초청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실수도 있었고, 연약함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한 방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걷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삶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성탄의 밤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혹시 여전히 옛길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구유 앞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화려한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십니다. 말구유처럼 낮은 자리에서,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걸어간 길을 함께 걷자.”
성도 여러분, 성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성탄은 오늘 밤,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가정에서 예수님을 닮은 말 한마디로, 일터에서 예수님을 닮은 선택 하나로, 이웃 앞에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작은 섬김으로 성탄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 성탄의 밤, 우리는 말구유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이제 너는 어떤 길로 돌아가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으로 나아가는 복된 결단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 성탄의 은혜가 오늘 밤의 추억으로만 남지 않고 내일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기를 소망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로 살아가는 모든 성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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